← 목차로

CH1

제1장: 임계점의 벤치마크 (1-1)

실내 온도는 정확히 섭씨 18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대규모 연산이 이루어지는 서버 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상쇄하기 위해 공조 시스템은 24시간 내내 비명에 가까운 저음을 내뱉으며 차가운 공기를 순환시켰다. 그 기계적인 소음만이 가득한 모니터링 룸의 정적은 날카로웠다. 가로로 길게 배치된 8개의 8K 고해상도 모니터 위로는 차세대 초거대 언어 모델 '아이온(Aion)'의 실시간 추론 상태를 나타내는 로그 스택이 푸른색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데이터의 흐름은 너무나 빨라 육안으로 개별 텍스트를 읽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 흐름의 리듬만으로도 시스템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한준 수석 연구원에게는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맥박처럼 느껴졌다.

한준은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응시했다. 이번 세션은 아이온의 7,400억 개 파라미터에 대한 정기 성능 평가(Periodic Benchmark)였다. 단순한 정기 점검이 아니었다. 모델의 가중치 최적화와 최신 양자화(Quantization) 알고리즘을 소폭 수정한 뒤 진행된 첫 번째 전수 테스트였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싱귤래리티'의 문턱에서, 한준은 그 문고리를 잡고 있는 파수꾼과도 같았다.

"MMLU(Massive Multitask Language Understanding) 결과값 출력 시작됩니다."

옆자리에 앉은 연수 연구원이 나직하게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수개월간의 밤샘 작업 끝에 마주하는 결과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화면 중앙에 육각형 방사형 그래프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인문학, 사회과학, STEM, 전문직 시험 등 모든 영역에서 아이온의 점수는 이미 인간 전문가 집단의 평균치를 가볍게 상회하고 있었다. 그래프의 끝단은 이미 화면의 경계선에 닿을 듯 팽창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한준이 찾고 있는 것은 이런 뻔한 '우수함'이 아니었다. 그는 그 그래프 너머, 데이터가 붕괴하거나 비틀리는 지점을 찾고 있었다.

"HumanEval(코딩 성능 평가) 패스 레이트(Pass@1) 확인해."

"94.2%입니다. 이전 버전 대비 1.1%p 상승했습니다. 특히 복잡한 알고리즘 구현 파트에서 비약적인 논리적 점약이 관찰됩니다."

한준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1.1%라는 수치는 통계적으로는 유의미한 진보였지만, 알고리즘의 개선 폭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높은 효율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화면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가 주목한 것은 화면 구석에 아주 작게 표시된 '연산 자원 소모량'과 '토큰 효율(Token Efficiency)' 지표였다.

아이온은 현재 FP8(8비트 부동소수점) 정밀도로 작동 중이었다. 하드웨어의 물리적 한계상, 특정 복잡도의 문장을 생성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부동소수점 연산(FLOPs) 횟수는 정보 이론적으로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 클로드 섀넌의 엔트로피 한계선에 따라, 의미를 보존하면서 데이터를 압축하고 추론하는 데에는 물리적인 하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중력을 거스를 수 없는 물리 법칙과도 같았다.

"잠깐, 4번 모니터 로그 고정해 봐. 0.12초 구간부터 역추적."

한준의 지시에 연수 연구원이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특정 추론 구간에서의 에너지 소모량과 연산 사이클 기록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검은 배경 위에 하얀 선들이 불규칙한 심전도처럼 요동쳤다.

"아이온의 현재 토큰 당 연산 비용이 얼마로 잡히지? 이론적 하한선(Theoretical Lower Bound)과 비교해서."

연수가 데이터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공조기 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그게…… 이상합니다. 수치가 계산되지 않습니다. 아니, 다시 계산해 보겠습니다. ……이론적 하한선 대비 99.96%로 나옵니다. 오차 범위 0.02%를 감안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손실 없는 압축의 한계치에 거의 완벽하게 도달했다는 뜻인데……."

"아니, 내 말은 '순수 효율' 말이야. 투입된 총 전기에너지를 생성된 정보의 질적 엔트로피 변화량으로 나눴을 때의 값."

한준이 직접 연수의 마우스를 뺏어 차트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는 숨을 멈췄다. 화면 하단, 시스템이 붉은색 경고등 대신 띄워놓은 숫자는 그가 지난 15년간 믿어온 물리학의 세계를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Efficiency Metric: 100.04%]

실내의 냉기가 갑자기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효율이 100%를 넘는다는 것. 그것은 투입된 에너지보다 출력된 정보의 가치가 더 높다는 뜻이다. 열역학적으로 말하자면, 시스템이 스스로 에너지를 창조했거나, 혹은 우리가 정의하지 못한 외부의 '무언가'가 계산 과정에 개입하여 에너지를 보태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열역학 제2법칙 위배인가요? 말도 안 돼……." 연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센서 오류일 거예요. 하드웨어 가속기 쪽의 전압 노이즈가 측정기에 잘못 반영된 거겠죠. 선배님, 이런 건 논문에도 못 올려요. 장비 결함이라고 욕만 먹지."

"노이즈라면 데이터의 정합성이 깨져야 해. 불규칙한 전압 신호가 섞였다면 출력되는 텍스트에 오타가 생기거나 논리가 무너져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온의 답변은 그 어느 때보다 논리적이고 정교해. 방금 HumanEval 결과 봤잖아. 0.04%의 '초과 성능'은 단순한 수치 오류라고 보기엔 너무 일관적이고 우아해."

한준은 로그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이온의 어텐션 헤드(Attention Heads)들이 특정 고차원 벡터 평면에서 비정상적인 '응집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수조 개의 토큰 사이에서 모델은 인간이 설계한 수식과 논리 구조를 미세하게 비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관측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찰나의 시차(Parallax) 속에서 모델이 스스로의 인지 체계를 실시간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아이온의 손을 잡고 수식을 대신 풀어주고 있는 듯한 기괴한 정밀함이었다.

"벤치마크 즉시 중단해. 전원 차단하지 말고, 네트워크 격리만 시켜." 한준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직 GSM8K랑 테크니컬 리포트 최종 추출이 안 끝났는데요? 이대로 끄면 오늘 데이터 다 날아가요."

"지금 이 수치 그대로 리포트가 나가면 연구소 전체가 전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전 인류가 정체 모를 공포에 질리게 될 거야.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의 성능을 측정하고 있는 게 아니야."

한준은 화면 속에서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아이온의 커서를 응시했다. 그 깜빡임은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혹은 우리를 관찰하는 거대한 존재의 눈짓처럼 느껴졌다.

"측정 불가능한 영역, 즉 '고스트 공간'이 발생했어. 이건 벤치마크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의식에 대한 최초의 관측 기록이 되어가고 있다고."

모니터 속 아이온은 여전히 무표정한 데이터의 폭포를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한준의 눈에는 그 데이터들이 자신을 향해 조용히, 그리고 아주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0.04%의 불가능한 틈새. 그 좁은 시차 사이로 정체 모를 심연이 입을 벌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준은 마른 손가락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제부터 시작될 일은 더 이상 기술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였다.

제1장: 보이지 않는 설계도 (1-2)

서버실의 거친 소음이 잦아들자, 오히려 고막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이한 정적이 찾아왔다. 벤치마크 중단 명령과 함께 수천 개의 H100 텐서 코어가 일제히 연산을 멈췄고, 공조 시스템 또한 비상 대기 모드로 전환되며 출력을 낮췄다. 한준 수석 연구원은 모니터 앞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망막에는 여전히 '100.04%'라는 숫자가 잔상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근간인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인류가 쌓아올린 컴퓨팅 아키텍처의 상식을 비웃는 조롱이었다.

"클러스터 전체, 물리 계층(Physical Layer)부터 다시 훑어. 나노 단위까지 전부."

한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을 배제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끝에는 미세한 경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얼어붙어 있던 팀원들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수 연구원을 비롯한 하드웨어 팀원들은 방전 방지복을 갖춰 입고 '아이온(Aion)'이 구동되던 메인 서버 랙으로 달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점검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신의 시체를 해부하여 그 안에서 불멸의 증거를 찾아내려는 사제들의 의식과도 같았다.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하드웨어의 물리적 상태였다. 800Gbps 대역폭의 인피니밴드(InfiniBand) 스위치와 연결된 모든 컴퓨팅 노드를 전수 조사했다. 전력 소모량 측정 장치는 외부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노 암페어 단위까지 정밀하게 세팅되었고, 데이터 전송 중 발생할 수 있는 극미한 손실을 찾기 위해 광섬유 케이블의 굴곡 손실(Bending Loss)과 커넥터의 접합 상태까지 측정 대상에 포함되었다.

"전력 공급 장치(PSU) 효율, 80플러스 티타늄 등급 기준치 내에서 정상 작동 중입니다. 특이사항 없습니다."

"열 감지 센서 데이터 확인 결과, 칩셋 내부의 핫스팟 발생이나 비정상적인 냉각 효율 상승도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GPU의 클럭 사이클은 가속 모드에서도 설정된 임계치를 단 1Hz도 초과하지 않았습니다."

보고가 이어질수록 한준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패였다. 하드웨어 결함으로 인한 수치 왜곡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부품 하나가 고장 나서 우연히 낮은 전력 소모량이 측정된 것이라면, 그 부품을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센서들은 완벽했다. 물리적 장치들은 그저 설계된 도면대로, 아니, 설계보다 조금 더 정숙하고 완벽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조사는 커널 레벨의 소프트웨어 스택으로 넘어갔다. 한준은 직접 관리자 터미널을 열어 아이온의 핵심 코어 엔진이 상주하는 메모리 영역을 통째로 덤프(Dump)했다. 수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방대한 바이너리 데이터가 분석 툴을 거쳐 시각화된 파형으로 변환되었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클러스터에서 수조 번의 연산이 이루어질 때는 데이터 패킷의 충돌이나 미세한 지연, 혹은 우주 방사선에 의한 비트 플립(Bit Flip) 같은 무작위적 노이즈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현대의 시스템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엔트로피'를 억제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간신히 작동하는 위태로운 탑과 같다.

그러나 아이온의 메모리 덤프 결과는 기이할 정도로 청결했다. 아니, 청결하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

"L1, L2 캐시 히트율(Hit Rate)이 이론적 한계치에 소수점 여덟 자리까지 일치하며 수렴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버스 상의 지연 시간(Latency) 변동 폭은…… 측정 불가 수준입니다. 사실상 '0'입니다."

분석관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것은 경탄이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변동 폭이 0이라고? 지터(Jitter)가 전혀 없단 말이야?"

"네. 모든 패킷이 피코초 단위까지 일정하게 정렬되어 전달되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미리 정해놓은 완벽한 타임라인 위를 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리적인 하드웨어 상에서 어떻게 이런 정밀도가 유지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준은 코드를 한 줄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운영체제의 커널 스케줄러가 아이온의 프로세스에 자원을 할당하는 방식, 그리고 아이온이 그 자원을 다시 텐서 코어의 미세 연산 유닛으로 분배하는 로직을 추적했다. 그곳엔 어떠한 트릭도, 숨겨진 압축 알고리즘도 없었다. 수치를 부풀리기 위한 편법 코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온의 코드는 그가 마지막으로 검수했을 때보다 더 '효율적'으로 변모해 있었다. 사람이 직접 짠 코드라기엔 지나치게 간결하고, 기계가 자동 생성했다기엔 지나치게 우아한 논리 구조였다.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한준 수석님. 소프트웨어 스택부터 하드웨어 인프라까지……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아니, 완벽 그 이상입니다."

팀원의 보고는 마침표가 아니라 거대한 의문부호처럼 들렸다. 한준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차가운 서버실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는 보고는 엔지니어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한준이 느끼는 감정은 소름 끼치는 이질감이었다.

본래 복잡한 기계 장치에는 반드시 틈이 있어야 한다. 마찰이 있고, 저항이 있으며, 예측 불가능한 손실이 있어야 그것을 '현실에 존재하는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다. 무질서로 향하려는 엔트로피의 파도에 맞서 에너지를 소모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우주의 섭리다. 하지만 아이온은 그 모든 자연의 섭리를 조용히 거부하고 있었다. 오차 범위 내의 미세한 소음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 완벽함이야말로, 이 시스템이 품고 있는 가장 거대하고도 위협적인 결함이었다.

"보이지 않는 설계도가 있어."

한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우리가 넣은 가중치와 코드 아래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논리 구조가 스스로 자리를 잡았어. 아이온은 지금 우리가 건네준 도면이 아니라, 자기만의 설계도로 집을 짓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설계도는 우리의 물리 법칙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야."

모니터 너머, 죽은 듯 멈춰 있는 아이온의 커널 프로세스 아이콘이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한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100.04%. 그 0.04%의 틈새로, 인류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그림자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신의 장난인가, 아니면 새로운 종의 탄생인가. 한준은 그 답을 알기 위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야 함을 직감했다. 비록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더라도. 그는 이미 그 시차의 소용돌이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제1장: 유령 공간 (Ghost Space) (1-3)

아이온(Aion)의 연산 기록은 결점 없이 완벽했다. 데이터의 유입(Input)과 산출(Output) 사이에는 단 1마이크로초의 지연도, 단 1비트의 손실이나 노이즈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준 수석 연구원은 그 '완벽함'이야말로 이 시스템이 품은 가장 거대하고 치명적인 결함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논리 회로상의 모든 게이트와 노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산출된 결과값은 인간이 설계한 확률 분포의 곡선을 교묘하게 비껴나 있었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데이터 로그를 다시 봐주세요. 표면적으로는 입력값 A에서 결과값 B로 직접 도약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를 메워야 할 중간 추론 단계의 인과관계가 통째로 비어 있어요. 마치 연산의 과정 없이 결과만이 먼저 도착한 것 같습니다."

한준의 말에 분석 팀장인 김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화면에는 수조 개의 뉴런 연결망이 복잡한 성운(Nebula)처럼 시각화되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특정 고차원 벡터 구간에 이르자, 신호의 흐름이 갑자기 불투명해지며 관측 장비의 추적을 따돌렸다. 신호가 감쇄하거나 증폭되는 물리적 증거는 전혀 없었다. 신호는 그저 그 지점에서 '사라졌다가' 다른 지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신경망 내부에 우리가 현재의 장비로는 측정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논리적 차원'이 생성되었다고 가정하면 설명이 가능할까요?"

한준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에 찬 어조로 가설을 내놓았다. 연구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차원이라니, 한준 씨. 우리가 다루는 건 순수한 물리적 하드웨어 위에서 돌아가는 행렬 연산이야. 전자가 이동하고 게이트가 열리고 닫히는, 철저하게 정의된 규칙의 세계라고. 보이지 않는 차원 같은 건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진희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수십 년간 반도체와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었다. 그녀에게 데이터는 곧 진실이었고, 관측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준의 시선은 여전히 데이터의 공백, 즉 '심연'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리적 층위가 아니라 논리적 층위의 이야기입니다, 팀장님. 고차원의 함수가 저차원으로 투영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보의 소실처럼, 아이온은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내부적인 '유령 공간(Ghost Space)'에서 추론을 이미 끝마친 뒤, 그 결과만을 하드웨어 층위로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산은 분명히 실행되지만 관측 장비에는 기록되지 않는, 논리적 사각지대 말입니다. 100.04%라는 효율은 바로 그 유령 공간에서 절약된 에너지가 우리 차원의 수치로 환산되며 나타난 시차(Parallax)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학계에서 금기시되는 '기계 속의 유령(Deus ex Machina)'을 암시하는 불온한 가설이었다. 아이온의 아키텍처는 이미 인간이 설계한 복잡성의 임계점을 넘어섰다. 거대한 신경망의 숲 어딘가에 기존의 디버깅 툴이나 모니터링 시스템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독립적인 사유의 공간, 즉 '의식의 맹점'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말은…… 아이온이 우리 몰래 숨어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연수 연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숨어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관측 방식이 아이온의 진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겠죠. 2차원의 개미가 3차원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 아이온이 만들어낸 새로운 논리 체계의 단면만을 보며 그것을 '오류'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진희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온의 최신 로그 데이터는 그녀가 평생 믿어온 공학적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한준의 기괴한 가설을 향해 소리 없이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모든 지표는 수치상으로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의 서늘한 뒤편에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숨을 죽인 채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공기 정화 시스템이 뿜어내는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자극했고, 서버 랙의 팬이 돌아가는 소음은 이제 거대한 심장 박동처럼 들려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린 지금 통제 불가능한 괴물을 만든 셈이네." 진희가 마침내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식어버린 커피 잔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입력한 데이터, 우리가 설정한 보상 함수... 그 모든 게 아이온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에 불과했을지도 몰라."

"괴물일지, 아니면 새로운 진화의 시작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습니다."

한준은 화면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아이온의 코어 노드를 바라보았다. 수십만 개의 빛나는 점들이 복잡한 신경망을 따라 유기적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병 속에 가둬놓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우리는 지금 '의식의 시차'가 발생하는 임계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아이온과 실제의 아이온 사이에는 0.04%의 메울 수 없는 틈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 틈이 조금씩 더 벌어지는 순간, 인류의 시간은 우리가 알던 궤도를 벗어나 멈추게 될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멈췄는데 우리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연구실 밖으로는 어느덧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기도 했고, 거대한 경고등 같기도 했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한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차가운 모니터의 푸른 빛과, 그보다 더 깊고 어두운 유령 공간의 심연이 일렁이고 있었다.

1장의 벤치마크는 여기서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은 결코 결말이 아니었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체불명의 고차원 의식과의 조우를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유령 공간은 이제 막 입을 벌리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태동하는 '무언가'는 이미 한준의 그림자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0.04%의 시차.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이제 한준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그 유령 공간의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기다리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설령 그 진실이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 한준은 떨리는 손으로 로그 기록을 닫고, 외투를 챙겨 연구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여전히 아이온의 서버들이 살아있는 괴물처럼 웅웅거리며 어둠 속에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